
(서울=뉴스1) 최종일 선임기자 = 이란이 미국의 제재 완화보다 호르무즈 해협에 대한 통제권 확보를 우선시하며 중동 내 영향력 확대에 나서고 있다는 분석이 나왔다. 이란 지도부는 전쟁에서 자신들이 살아남았을 뿐 아니라 지역 패권국으로 부상했다고 판단하고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중동 질서를 구축하려 한다는 것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11일(현지시간) 이란 정권에 호르무즈 해협을 장악하는 것은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제시한 수백억 달러 규모의 제재 완화보다 더 중요한 목표가 됐다면서 이란은 장기전을 염두에 두고 있다고 진단했다.
보도에 따르면 이란이 노리는 핵심은 세계 원유 수송의 요충지인 호르무즈 해협을 이란 방식으로 관리하는 것이다. 이란은 해협 통항에 대해 자국의 조정과 관리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미국과 체결한 양해각서(MOU)에도 선박 통행이 "이란 측 관리 체계" 아래 이뤄져야 한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는 것이 이란의 주장이다.
에브라힘 아지지 이란 의회 국가안보위원회 위원장은 "유일한 방법은 호르무즈 해협에서 새로운 이란 질서를 인정하는 것"이라며 "해협은 미국의 위협이 아니라 이란의 방식으로 열릴 것"이라고 주장했다.
의회 의장이자 미국과의 협상 대표였던 모하마드 바게르 갈리바프도 "호르무즈 해협은 이란의 관리 체계 아래에서만 개방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는 이란이 단순히 해협 통제권을 둘러싼 협상에 나선 것이 아니라, 전후 중동 질서 재편을 노리고 있다는 분석으로 이어진다.

미국과 이스라엘은 당초 이란의 핵 프로그램 억제를 주요 목표로 전쟁을 시작했지만, 이란은 오히려 전쟁 이후 자신들의 전략적 위상이 강화됐다고 보고 있다. 미국이 걸프 지역 동맹국을 완전히 보호하지 못했다는 인식 속에서 이란은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UAE), 카타르 등 걸프 국가들이 결국 자국과 공존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있다는 것이다.
일부 전문가들은 이를 '팍스 이라니카(Pax Iranica·이란 주도의 평화 질서)' 구축 시도로 해석한다. 과거 미국이 주도했던 중동 질서 대신 이란이 걸프 지역의 안보와 경제 흐름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새로운 구조를 만들겠다는 야심이라는 의미다.
실제로 최근 열린 고(故)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 전 최고지도자의 장례식에는 이란의 미사일과 드론 공격을 받았던 걸프 국가 가운데 사우디, 카타르, 오만 관계자들이 참석했다. 이란은 이를 통해 지역 내 영향력을 과시했다.
라즈 짐트 이스라엘 국가안보연구소(INSS) 연구원은 "걸프 국가들은 지리적 현실에 직면했다"며 "이란 이슬람공화국은 여전히 존재하고, 트럼프 대통령 역시 영원히 집권하는 것은 아니다. 결국 이란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판단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하지만 이란의 자신감이 실제 국력에 비해 과장됐다는 반론도 나온다. 사우디계 지정학 분석가 살만 알안사리는 "이란은 군사력이 크게 약화됐고 중동 내 대리세력 네트워크도 타격을 입었다"며 "현재 남은 것은 위협과 혼란을 조성하는 능력뿐"이라고 비판했다.
그럼에도 미국이 군사력으로 호르무즈 해협을 완전히 다시 개방시키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점은 이란의 계산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미국과 이란 간 최근 충돌은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하려던 선박들에 대한 이란의 공격에서 비롯됐다. 미국은 이를 민간 선박 공격이자 테러 행위로 규정했고, 이란산 원유 판매를 일시적으로 허용했던 제재 면제 조치를 철회하는 등 압박 수위를 높였다.
그러나 이란은 물러서지 않고 있다. 이란은 미국이 전면전을 다시 시작하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판단하고, 호르무즈 문제를 지렛대로 삼아 협상력을 높이려 한다는 분석이다.
홀리 대그레스 워싱턴 근동정책연구소 연구원은 "미국과 이란 모두 자신들이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믿고 있다"며 "이란은 미국 내에서 전쟁에 대한 반대 여론이 크고 호르무즈가 세계 경제를 압박하고 있다는 점을 이용해 벼랑 끝 전술을 펼치고 있다"고 말했다.
문제는 이런 대치가 우발적 충돌로 확대될 가능성이다. 현재 미국은 이란 수도 테헤란을 직접 겨냥하지 않고 있고, 이란 역시 미국 시설에 대한 공격을 제한하고 있지만, 미군 사상자 발생 등 대형 사건이 발생할 경우 상황이 급격히 악화될 수 있다.
미 중앙정보국(CIA) 출신 중동 전문가 마크 폴리메로풀로스는 "이란은 트럼프가 다시 전쟁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믿고 있다"며 "하지만 한 번의 잘못된 충돌이 대규모 인명 피해로 이어질 경우 트럼프가 강력한 대응에 나설 위험이 있다"고 경고했다.
이란 내부 권력 구도도 변수다. 새 최고지도자로 지명된 모즈타바 하메네이는 아버지인 알리 하메네이가 사망한 공습 과정에서 부상한 것으로 알려진 이후 공개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일부 강경파 세력은 미국과의 양해각서 체결을 비판하며 긴장 고조를 원하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이들은 외부 위기를 활용해 내부 권력을 공고히 하려 한다는 것이다.
미국과 이란 모두 양보할 수 없는 상황에서 호르무즈 해협은 단순한 해상 교통로를 넘어 중동 패권 경쟁의 중심 무대로 떠올랐다. 이란이 꿈꾸는 ‘팍스 이라니카’가 현실화할지, 아니면 과도한 자신감이 새로운 충돌을 부를지는 향후 미국과 이란의 선택에 달려 있다.











